[좋은글] 인생의 묘미 - 김소운 - 목마른 자만이 아는 물 한 그릇의 행복!

인생의 묘미

실패란 것이 있고, 성공이란 것이 있다. 어떤 것이 성공이며 어떤 것이 실패인가를 ㄱ씨는 모른다. 천 원 어치 행상꾼이 만 원 밑천으로 판자 가게를 내게 된 것도 성공이요. 10억 자본의 큰 회사가 5억으로 줄어든 것도 실패라면 실패이다. 10만 원 이윤을 기대했던 장사가 5만 원 번 것은 실패라고 볼 수 있고, 5천 원을 바랐다가 만 원이 생기면 이것은 성공일 수밖에 없다. 하필 물질이나 장사속에만 한한 것이 아니리라. 인간 일생을 통틀어서 과연 어느 것이 성공이요 어느 것을 실패라고 할 것인가? 이 점에 있어서는 언제나 ㄱ씨는 회의적(懷疑的)이다.


인생의묘미

그러나 누구의 눈에도 뚜렷한 결정적인 실패란 것이 있다. 누구나 인정하는 불행도 있다. 이 실패, 이 불행에 인생을 아로새기는 묘미가 있다고 ㄱ씨는 생각한다.

십여 년 전 ㄱ씨는 '바둑판'을 두고 글 하나를 쓴 적이 있다. 비자나무로 다듬은 일본식 바둑판―단면의 무늬가 고르고 모든 조건에 합격한 1급품은 30년 전 값으로 2천 원. 요즘 시세로는 30∼40만 원은 간다.

이 1급품 위에 또 하나 특급품이란 것이 있다. 용재(用材)1)며 치수며 연륜의 무늬며 어느 점에도 1급품과 다른 데가 없으나, 반면(盤面)2)에 머리카락 만한 가느다란 흉터가 보이면 이것이 '특급품'이다. 물론 값도 1급보다 10퍼센트 정도 비싸다.

흉이 있어서 값이 내리는 게 아니고 도리어 비싸진다는 데 진진한 흥미가 있다.

오랜 세월을 두고 공들여서 기른 나무가 바둑판으로 완성될 직전에 예측하지 않은 사고로 금이 가버리는 수가 있다. 1급품 바둑판이 목침감으로 전락(轉落)할 순간이다.

그러나 그것이 최후는 아니다. 금간 틈으로 먼지나 티가 들지 않도록 헝겊으로 고이 싸서 손가지 않는 곳에 간수해 둔다. 1년 이태, 때로 3년까지 그냥 두어둔다. 추위와 더위가 몇 차례 없이 반복되고, 습기(濕氣)와 건조(乾燥)가 여러 차례 순환한다. 그 새 상처 났던 바둑판은 제 힘으로 제 상처를 고쳐서 본디 대로 유착(癒着)3)해 버리고, 금 갔던 자리에 머리카락 같은 흔적만이 남는다. 언제나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소경은 언제나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한번 금간 그 시련을 이겨내는 바둑판은 열에 하나가 어렵다.

일어(日語)로 '가야방'이라는 이 비자목 바둑판은 연하고 부드러운 탄력성이 특질이다. 한두 판만 두어도 돌자국으로 반면(盤面)이 얽어 버린다. 그냥 두어 두면 하룻밤 새 본디대로 다시 평평해진다. 돌을 놓을 때의 그 부드러운 감촉, '가야방'이 진중(珍重)되는 것은 이 까닭이다.

한 번 금이 갔다가 다시 제 힘으로 붙어진 것은 그 부드럽고 연한 특질을 증명해 보인, 이를테면 졸업 증서(卒業證書)이다. 하마터면 목침 감이 될 뻔한 비자목 바둑판이 이래서 특급품으로 승격한다.

ㄱ씨가 말하는 인생의 묘미란 이것이다.

실패나 불행은 환영할 것이 못된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은 아니다. 실패와 성공을 몇 차례 없이 거듭하면서, 쓴맛 단맛을 고루고루 겪어 가면서 살아가는 인생 ― 만일에 쓰러진 채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실패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막가는 실패요 불행일 수밖에 없다. 금이 간 채 제 힘으로는 아물지 않는 바둑판 맞잡이이다.

그러나 ㄱ씨는 믿고 있다. 때로는 그 불행, 그 실패로 해서 한결 더 깊어지는 인생이 있고 정화(淨化)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간이 바둑판만은 못하다고 해서야 될 말인가"

옛날 쓴 ㄱ씨의 글에는 이런 끝맺음이 붙어 있다.

행복의 기준은 어디다 두어야 할 것인가? 앞 못보는 소경은 단 한 번 빛을 보기를 원할 것이요, 다리를 못쓰는 앉은뱅이는 제 발로 걸을 수만 있다면 ― 하는 것이 가장 절실한 소망일 것이다.

ㄱ씨는 그 옛날 수인 호송차(囚人護送車)에 실려서 대도회(大都會)의 큰 길을 달린 적이 있었다. 호송차에서 내다보이는 길 가는 사람들의 그 행복스런 모습, 그러나 행인들에게 그 행복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제 눈으로 빛을 볼 수 있는, 제 다리로 길을 걸을 수 있는 성한 사람들이 만일에 소경이나 앉은뱅이의 마음을 가질 수만 있다면 이 세상의 불행은 얼마나 줄어들 것인가? 자유롭게 제 발로 길 가는 행인이 호송차에 실려가는 수인의 마음을 엿볼 수만 있다면 그들은 제 자신의 행복에 얼마나 가슴이 뛸 것인가?

온 천지에 넘쳐흐르는 행복! 목마른 자만이 아는 물 한 그릇의 행복!

― ㄱ씨는 눈을 감고 이런 생각에 잠길 때가 있다.


김 소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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